-
목차
잘츠부르크는 로마 정착지에 있으며 696년에 주교좌로써 설립되었고 798년에는 대주교의 소재지가 됩니다. 잘츠부르크의 주된 수입은 무역과 금 채굴 및 소금추출이었습니다. 호엔잘츠부르크 요새는 유럽 중 가장 큰 중세시대 요새 중 하나로 11세기 경에 만들어졌습니다. 17세기에는 굉장히 많은 바로크 양식의 교회가 세워지고 수도원도 만들어졌으며 반종교 개혁의 가장 중심이 되었습니다.
역사적 중심지인 잘츠부르크는 바로크 건축물로 지어져 굉장히 유명하고 알프스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상당히 잘 보존되고 있는 도시 중에 하나입니다. 1996년에 역사의 중심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하였으며 여기에는 총 3개의 대학교가 있고 학생들이 많이 거주합니다.
8세기 후반 경에 잘츠부르크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기록되었으며 이는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독일어로 소금을 뜻하는 잘츠와 두 번째로는 서게르만조어에서 유래된 부르크입니다.
1.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역사
에레느루디스를 위하여 설립되었는데 8세기 논베르크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그러하였으며, 추후에 그분은 성인으로 추대되기도 하였습니다. 도시지역에는 지속적으로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보이며 신석기시대부터 현재까지로 추정됩니다. 노리쿰 왕국이 집권하던 라 테네 시대에는 켈트 명반의 행정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였습니다.
로마의 침공이 있었던 기원전 15년 당시에는 구시가지 지역에 로마의 도시가 만들어지면서 잘츠부르크 언덕에 위치한 수많은 정착지들은 버려지고 말았습니다.
488년 이주 초기 당시에는 노리쿰 지방이 무너졌습니다. 그때에는 로마 노켈트족 일부만 이 곳에 남아있었습니다. 6세기 경에는 바이우바리의 통치 아래 살게 되었습니다. 성 루퍼트는 성자가 도시를 다시 탄생하게 만든 공로를 인정하였고 그 시기는 8세기입니다. 잘츠부르크의 루퍼트 주교는 서기 696년경에 바이에른 테오도 2세 공작에게 로마 도시의 카스트룸 수페리우스와 유적을 받게 됩니다. 그 대가로써 바이에른 지방의 남동쪽과 동쪽의 지역을 복음화하는데 앞장서야 했습니다.
루퍼트는 대성당을 지을 부지를 찾아야 했으므로 주변 강가를 정찰하였으며 사제들을 성임해 피딩할 영지들을 합병하였습니다. 오늘날 루퍼트는 대성당이 위치한 곳에 성베드로 교회를 지었으며 추측하건대 친척을 위하여 베네딕토회 수녀원과 수도원을 논베르크에 만들었을 것입니다. 서기 739년부터 잘츠부르크는 교구 주교의 소재지로써 서기 798년부터는 대주교의 소재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호엔잘츠부르크 요새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로마 요새의 자리 언덕 꼭대기를 에워싸는 고리모양의 벽이 존재합니다. 소금성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독일 이름의 잘츠부르크는 최초로 성 보니페이스가 최초로 사용하였으며 바이에른 교구 조직에 대한 빌리발트 보고서에 사용된 서기 739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잘츠부르크는 잘차흐라는 강에서 소금을 실어 나르는 바지선으로부터 유래하였는데 이 배는 8세기경 유럽의 강에 있는 다양한 공동체와 도시들에 통행료를 부과하기도 하였습니다. 1077년 게브하르트 대주교가 호엔잘츠부르크 요새를 자신의 거주지였던 로마 요새 자리에 만들었습니다. 그곳은 한동안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잘츠부르크는 광범위한 선교적 활동과 소금 채굴로 인하여 바이에른 안에서 점점 더 큰 권력과 영향력을 얻었습니다. 996년 신성 로마 황제는 대주교에게 주조 권리, 통행료법과 시장의 권리를 임대했다고 합니다.
2. 잘츠부르크의 독립
14세기 후반 바이에른으로부터 독립하게 됩니다. 잘츠부르크는 신성 로마 제국의 주교관 겸 왕자인 대주교의 소재지였고, 종교적 개혁 운동이 확산되면서 주변 마을의 농민들 간에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 곳은 농민 전쟁 중에 모두 농민에게 점령당했고 대주교는 비교적 안전한 곳인 요새로 급히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그는 1525년에 3개월 동안 포위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긴장과 폭동은 가라앉았으며, 도시가 독립함으로써 번영과 부가 증가하였으며 이는 16세기 말부터 18세기까지 볼프 디트리히 폰 라이테나우 대주교, 파리스 로드론, 마르쿠스 시티쿠스가 통치하는 동안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17세기에는 바로크 양식을 연구한 오스트리아인과 이탈리아 출신의 건축가가 다양한 궁전과 지금의 도심을 재건하였습니다.
3. 20세기의 잘츠부르크
헝가리-오스트리아 제국의 해체 및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잘츠부르크는 새로운 독일 오스트리아의 일부로서 헝가리-오스트리아 영토 중 하나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1918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중심부에 존재하는 독일어권 지역을 대표하기도 하였습니다. 1919년 생제르맹앙라이 조약 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되었습니다.
1938년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위한 국민적 투표 하루 전에 나치 독일에 합병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독일군이 도시로 이동하였고 이후 유대인 시민, 기타 소수민족들, 정치적 반대자들이 체포되었고 강제 수용소로 수감되었으며 회당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독일이 소련을 공격한 이후 다른 국적 및 소련의 포로를 수용했던 여러 포로 수용소들이 도시에 새롭게 조직되었습니다. 나치가 점령하는 기간 동안 잘츠부르크 막스글란에 로마니 수용소가 만들어졌습니다. 연합군의 집중 폭격으로 550여 명의 주민이 사망하고 7600채의 건물들이 파괴되었습니다. 잘츠부르크 기차역 인근의 가옥들이 파괴되고 15번의 공습이 진행되었으며 도시의 46% 건물들이 망가졌습니다. 다행히도 마을의 대성당 돔과 다리는 파괴되었으나 바로크 양식의 많은 건축물들은 대부분 보존되어 그대로 남게 되었습니다. 1945년에 미군이 이 도시에 입성하였고 곧 미국이 점령하는 지역으로써 중심이 되었습니다.
4. 지리와 기후
잘츠부르크는 잘자흐 강에 위치하고 알프스 북쪽의 경계에 있습니다. 잘츠부르크의 남쪽에 있는 산은 북쪽 지역의 평야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도심에서 16km 정도 떨어져 있는 운터스베르크는 가장 가까운 고산봉우리이며 높이는 1972m입니다. 구시가지인 알 슈타트는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와 탑이 있으며 굉장히 큰 호엔잘츠부르크 요새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옆 지역에는 작은 언덕 두 개가 있어 녹색 도시를 이룹니다.
쾨펜은 잘츠부르크를 습한 대륙성 기후로 지정하고 있으나 계절 간 온도 차이가 커서 4계절 해양성 기후로도 분류할 수 있습니다. 여름철 강수량이 상당히 높은 편인데 이는 알프스의 북쪽 중 가장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봄과 겨울에는 푄바람이 뚜렷하고 정기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